사랑하는 웜우드에게

지난 주중에 진행한 ‘장목사가 읽어주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스물여섯 번째 시간에 나누었던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이 글은 악마 세계의 간부인 스크루테이프가 졸개 마귀인 웜우드에게 쓴 편지라는 가상의 형식을 취한 글이며 마귀들의 관점으로 읽어야 하는 글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크게 반성하는 계기가 된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인데요. 혹시 이러한 가르침이 우리 교회와 가정 안에 이어지고 있다면 속히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교우 여러분들과 나눕니다.


사랑하는 웜우드에게,

사랑’이라는 말의 모호한 뜻을 잘 이용하도록. 사실은 아직 매력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문제들을 보류하거나 연기한 상태이면서도, 정작 본인은 사랑의 힘으로 이미 해결했노라고 믿게 해야 한다. 이런 상황을 오래 끌어야, 문제들을 은밀하게 악화시켜 고질병으로 만들 기회가 생기는 게야. 제일 큰 문제는 ‘비이기주의’(unselfishness)이다. 이 점에서도 역시 우리 언어학적 무기의 탁월한 업적 덕분에, 원수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적극적 개념이 ‘비이기주의’라는 소극적 개념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바란다. 애시당초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자기 이익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이익을 포기하도록 가르칠 수 있게 된 건 다 이 덕분이야. 우리로선 큰 점수를 따고 들어가는 셈이지. (중략)


형식적이고 율법주의적이고 명목뿐인 ‘비이기주의’가 하나의 규칙 – 감정적 자원은 이미 고갈되었는데 영적인 자원은 아직 확장되지 못한 탓에 지키지 못하게 된 규칙 – 으로 일단 자리만 잡는다면, 그야말로 유쾌하기 짝이 없는 결과들이 줄줄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중략)


일이 이쯤 되면 ‘아량 싸움 망상증’(Generous Conflict Illusion)이라고 부를 만한 공작에도 도전해 볼 수 있다. 이 게임은 다 자란 자식이 끼어 있는 가정처럼 선수가 두 사람 이상 참가해야 재미있어. 아주 사소한 일, 예컨대 정원에서 차를 마시자는 제안이 나왔다고 하자. 다른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자기는 별로 생각이 없지만 다른 사람이 원한다면 마시겠노라는 뜻을 분명히(그러나 말을 아껴 가며) 전한다. 그러면 처음에 말을 꺼냈던 사람은 금세 자기의 제안을 철회해 버리는데, 표면상의 이유야 물론 ‘비이기주의’때문이지만 사실은 지금 말한 사람의 치사한 이타주의에 놀아나고 싶지 않다는 심리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말한 사람 역시 비이기주의를 실컷 행사할 수 있는 이 기회를 포기하지 않으려 든다. 그래서 그는 계속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하라고 우기고,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대로 그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우긴다. 감정이 점점 격해진다.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의 입에서 “좋아, 마음대로 해. 난 절대 안 마실 테니까!”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바야흐로 양쪽 모두 독한 분노를 품고 진짜 싸움에 돌입한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겠느냐? 만약 처음부터 각자 자기 뜻을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면 이성과 예의라는 테두리를 지킬 수 있었겠지. 그러나 이 의견 충돌은 제 뜻을 고집하느라 생긴 게 아니라 거꾸로 상대편의 뜻을 고집하느라 생긴 것이거든. 이렇게 자신들이 실천하고 있는, 또는 적어도 변명으로 삼을 수 있는 명목상의 형식적인 ‘비이기주의’의 그늘에 가려 버린 형편이니, 실상 이 모든 분노는 좌절된 자기 의와 고집과 지난 10년간 쌓여 온 불만에서 비이기주의가 싸구려에 불과하다는 점과 그로 인해 자신이 그릇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점은 아주 민감하게 느끼고 있지. 그러면서도 멍청하게시리 정작 자기는 아무 잘못 없이 억울하게 이용당했다고 느끼거든. 사실 이 정도의 부정직성이야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만해.


어떤 분별 있는 인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비이기주의가 얼마나 많은 악감을 낳는지 안다면, 설교 단상에서 그것을 그렇게 자주 권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략) 환자의 영혼을 확보하려면 소소한 진짜 이기주의보다는 정교하면서도 자의식이 강한 비이기주의의 초기 징후들이 결국엔 더 값진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 그런 징후들은 내가 설명한 것과 같은 종류의 악으로 꽃필 가능성이 농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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