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의 우상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이 세상의 물결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98년도에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이래 20년 동안 수많은 사회적인 도전 앞에서 섰지만, 한 교회의 담임목사인 지금 점점 강성해지는 다원화 시대의 도전이 만만치 않게 느껴집니다. 크리스천 변증가이며 작가인 죠시 맥도웰(Josh McDowell)은 이미 2여년 전에 21세기의 기독교의 가장 큰 위기는 동성결혼도 임신중절도 아니고 마약도 아 니라 ‘관용의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관용은 기독교인의 아주 중요한 덕목 중 하나입니다. 관용의 원래 의미는 나하고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도 존경심을 표하는 아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원수이고, 나와 동의하지 않으면 모두 사탄의 사람들로 치부하는 사회에서 기독교인의 관용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요즘 이 관용의 정의가 바뀌었습니다. 내가 옳듯이 다른 의견을 가진 남도 옳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의식구조를 관용이라 하는 것입니다. 사회가 다원화 되어 가면서 자기 것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편협해 보이고, 옹졸해 보이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옳고 불교도 옳고 이슬람도 옳은 것이고 무엇을 믿든 신실하게만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하는 것은 신실하게 믿는다고 거짓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피력합니다. 관용을 덕으로 삼는 이 시대에 웬 편협한 주장이냐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신실하게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에게 그런 혐오스러운 발언을 할 수 있냐고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이 난 빌딩에서 위기를 만난 사람들이 탈출구를 찾는데, 소방대원이 탈출구는 이 문밖에 없으니, 이 길로 나가라고 명할 때, 어떤 사람이 그 명령은 편협하다고 비판할 것이며, 어찌 다른 출구를 찾는 사 람들을 미워하느냐고 따질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진리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이 진리를 모르는 자들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이 진리를 소개할 의무가 있습니다. 불 난 집에서 구원받을 유일한 출구를 소개할 의무입니다. 거짓 관용이 우리의 문화를 장악하고 있는 다원화의 시대에 동성결혼이나 임신중절도 각자의 자유이며, 마약을 하든지 포르노를 즐기든지 제 멋에 사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관용의 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우상이 우리의 생각을 장악하는 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는 그 순간 무용지물이 됩니다. 진리를 모르는 자들을 보면서도 복음을 전하려는 열심이 식어가는 이유가 혹, 우리에게도 거짓 관용이 우리의 생각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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