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럽고 낯설며 공포스럽기까지 하지만

올 초부터 꼭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던 일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에 계신 외삼촌을 찾아 뵙는 일입니다. 보통 외삼촌과 가까운 분들이 얼마나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와 제 동생의 경우 외삼촌은 매우 가까운 가족이셨습니다. 6남매 중 둘 째인 저희 어머님은 다섯 째인 외삼촌을 잘 챙기셨습니다. 한국에서 제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외삼촌은 저희 집에서 지내셨습니다. 저희가 미국으로 이민 온지 몇 년 만에 외삼촌은 미국으로 오셨고 역시 저희 집에서 함께 지내셨습니다. 그래서 외삼촌과 한 집에서 보낸 시간이 꽤 깁니다. 외삼촌은 유머러스하고 순수한 분이셨습니다. 비록 세상살이가 늘 마음대로 되지는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가 많으셨지만 그 와중에도 얼굴에 웃음을 잃지는 않으셨습니다. 군대에서 탁구 챔피언이셨던 외삼촌께 저와 동생은 탁구를 배웠고 낚시를 즐기셨던 삼촌과 바다 낚시와 민물 낚시를 수 년간 함께 했습니다. 제가 텍사스로 이사를 온 후 삼촌은 당뇨병을 얻으셨습니다. 어머님은 희귀암과 싸우며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동생이 식단조절과 운동을 하도록 돌봐 주셨습니다. 2달전 건강악화로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금요일 새벽에 삼촌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원인은 코비드19였습니다. 삼촌이 오래 못 사실 것 같아 꼭 찾아 뵈려고 했던 것인데 결국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 떠나 보내드려야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의 마지막은 갑작스럽게 찾아옵니다. 100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목숨을 잃은 팬데믹 기간 중에도 죽음은 갑작스럽고 낯섭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죽음을 아주 잘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갖고 호흡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죽음은 낯설고 갑작스럽습니다. 지금까지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죽어왔고 또 앞으로도 죽어갈 것인데도 그렇습니다.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지만 친숙해지기는 어렵습니다. 만일 죽음 이후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면 죽음은 공포스럽기까지 합니다. 죽음 이후에 대한 아무런 소망이 없다면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말은 그저 듣기 그럴 듯한 철학적 한 마디일 뿐입니다. 어느 누구도 낯설고 갑작스러우며 공포스럽기까지 한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을 이길 수 있게 해주신 분이 계십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죽음을 이기게 해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끔찍한 죽음이 없는 곳에서 기쁨과 평강 가운데 영원히 살게 하십니다. 삼촌을 보내드리며 이 귀한 말씀을 다시 한 번 마음에 깊이 새깁니다.


51 우리가 다 잠들 것이 아니라, 다 변화할 터인데,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눈 깜박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52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53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54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55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56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57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고전 15:5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