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긴 몰라도, 아마 현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천국’에 대해 듣는 두 가지 말을 조화시키는 대 어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한편으로 천국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 하나님을 뵙는 것, 끝없는 찬미를 뜻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천국의 삶 역시 몸으로 향유하는 삶(bodily life)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우리가 현세에서 지복직관(至福直觀) 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것처럼 느껴질 때를 보면, 그 순간 우리 몸은 그런 일과 거의 무관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또 영생을 (어떤 종류의 몸이든 하여간) 몸으로 향유하는 삶으로 생각해 보려 하면, 우리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느끼는 – 응당 그렇게 느껴야 합니다 – 신비적 접근과는 거리가 먼, 플라톤적 파라다이스나 헤스페리데스(Hesperides)의 정원 같은 것을 막연히 떠올리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일치성이 궁극적인 것이라 한다면, 하나님이 우리 영들을 자연계 질서 속에 들여놓으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실수라는 말이 되고, 이는 터무니없습니다. 우리는 그 불일치성이 실은 ‘새 창조’가 치유하게 될 무질서 중 하나라고 결론지어야 합니다. 몸이, 또 장소성(locality)이나 이동성(locomotion)이나 시간 같은 것이 지금 우리에게, 최고 경지의 영적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은 어떤 증상(symptom)입니다. 영과 자연이 우리 안에서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은 바로 이것입니다
-C. S. Lewis의 <기적> 16장 새 창조의 기적 중에서
켄터키로 이사가시는 중에 달라스를 들르신 이모님 가정과 운전해주기 위해 함께 온 제 동생과 한 주 동안 시간을 보내면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이모님 가정과는 한국에서부터 늘 가까웠습니다. 30년 이민의 삶을 더불어 살아온 동생과 이모, 이모부님과 사촌동생과 강아지 한 마리까지 8명의 사람과 2마리의 강아지가 북적대는 한 주를 보냈습니다. 더불어 함께 해온 30년 이민 생활을 뛰어 넘어 한국에서의 시간까지 50년을 넘나드는 추억 가득한 이야기들과 지난 5-6년 사이에 먼저 떠난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 앞으로의 계획에 관한 이야기, 신앙과 신학, 이민과 이사 그리고 영육간의 건강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로 온 집안이 울리도록 떠들고 웃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언제든 다시 볼 수도 있는 가족들이지만 어쩌면 연로해가시는 이모님 가족들과의 이런 특별한 시간은 이 땅에서는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문득 하늘에 계신 어머니 생각이 참 많이 났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주님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될 영원한 나라에 대한 갈망이 더욱 간절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영원을 갈망하며 동시에 육신의 한계를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야 할 우리의 모습에 감사한 면도 분명히 있지만 한편으로는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땅에 여전히 남겨진 우리는 C. S. Lewis가 위에 ‘불일치성’으로 표현한 ‘우리가 앓고 있는 병’과 계속해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세상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시는 그 나라에서 우리의 영혼과 육신이 진정으로 하나 되어 궁극적인 기쁨과 자유를 경험하게 될 ‘새 창조’의 날이 기다려지는 한 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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