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92년도까지 한국에서 살 때 교회를 가본 적이 없습니다. 미국 오기 전까지 살던 집은 축대를 사이에 두고 교회와 붙어 있던 집이었는데도 그 교회 마당도 밟아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늘 시끄럽게 스피커를 크게 틀어놓고 찬양을 하고 통성기도를 하는 그 교회 바로 옆에 산다는 것이 늘 불만스러웠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아들이 감옥까지 다녀온 건달이었다는 소문과 목사님의 거만해보이는 태도 때문에 그 교회에 대한 이미지는 최악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을 놀릴 때도 많았습니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 와서 몇 달 안되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샌디에고 인근의 외각에 자그마한 집을 렌트하여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생전 처음 가보는 교회가 아주 싫지는 않았습니다. 이민자들이 모여 정말 뜨겁게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나 정겹게 식사를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목사님 사모님은 치과 의사라 저렴하게 진료도 해주는 등 여러가지 혜택을 많이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과 사모님이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목회자와 성도로 만나 외도를 하여 배우자와 이혼하고 재혼한 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부모님은 가차 없이 교회를 떠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생각해보니 그 목사님은 저녁 시간에 연락도 없이 심방을 와 식사를 함께 하는 등 이상한 점이 꽤 많았습니다.
그 교회를 떠난 후 찾은 교회는 샌디에고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한 침례교회였습니다. 미국 이민 생활을 수십년씩 하신 여자 집사님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참 정이 많고 음식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생활 초창기의 예배는 별로 기억이 나지 않지만 주일마다 풍성한 식탁으로 5-60명 정도 되는 분들이 참 따뜻하게 교제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따뜻하게 교제를 하는 중에도 목회자와 성도, 성도와 성도, 목회자와 목회자 사이에 늘 분쟁이 많았습니다. 그 교회를 다니던 8년의 기간 동안 좋은 분들도 많이 만났지만 큰 싸움이 수 차례 있었고 안수 집사로 세워주질 않는다고 예배 중에 강단을 장악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또 쫓겨나는 목회자, 싸우고 떠나는 목회자, 비자 안 해준다고 갑작스럽게 떠나 버리는 반주자 등을 보았습니다.
그 교회를 떠나 새롭게 정착했던 곳은 전 세계 한인 이민 교회들 가운데 가장 크다는 곳이었습니다. 이전에 경험했던 교회들과는 이모저모로 차이점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비로소 무언가 배울 점이 있고 감동을 주는 교회를 만났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은혜롭게 찬양을 연주하고 부르던 분들은 술집에서 만나 교제를 하였고 청년부 간부들도 엘에이의 클럽에 함께 다녀온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소그룹 리더로 섬기며 대단한 모범을 보이던 순장님에게는 사업이 부도나자 잠적해버렸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게 칭송을 받던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한국으로 들어가 덕이 안 되는 여러가지 이슈의 중심에 서게 되는 분이었습니다.
전도사로 섬기던 교회는 오랜 시간 이단 시비가 있던 교회였습니다. 목사님은 인간적으로 참 편하고 좋은 분이었지만 목사님 입을 통해 성경 해석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을 직접 제 귀로 듣게 되는 실망스러운 상황들을 마주할 때가 많았습니다. 금니를 만들어 준다고 하거나 정신이 맑아진다며 직접 귀를 뚫어주는 부흥사들이 강단에 서는 교회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접했던 교회도 문제 투성이로 보였던 교회였지만 제가 하나님을 만난 후에 섬겼던 교회들도 문제 투성이 교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 투성이 교회들을 섬기는 동안 저는 신앙이 자랐고,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었으며, 신학을 결정하게 되었고 목사가 되어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문제 많은 교회들을 통해 저의 삶에 선하게 일하신 하나님께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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